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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glish)
HITS SINCE 1997/7/25
HITS SINCE 1998/6 ..
---------------- 김 영 관 (yeungkwan
kim) ------- 인간은 언제나 해방공간을 갈구하고 있다.
1945년 8월 15일 조국의 해방뿐만이 아니라 어린 아이들까지 그들 스스로가
자유로울 해방공간을 갈구하고 있는 것이다. 아이나 어른이나 답답한 공간을 벗
어나 자유로운 바람이 부는 거리를 마음 속에 바라고 있는 것이다.
- 김 동 하 -
나는 김동하라는 사람을 이제껏 한번도 만난 일이 없다.
그런데 나는 그가 쓴 해방공간이라는 글을 읽고 그대로 그 자리에 얼어 붙는
듯한 충격을 느꼈는데, 그것은 해방공간이라는 말 자체뿐만이 아니라 1945년 조
국의 해방이라는 말에서 현재의 갇힌 어린 아이들과 어른들의 심리를 읽어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난 생각했다. 지금 제일 괴로운 것은 바로 김동하라는 인물일 것이라
고. 그가 1945년 조국 해방을 운운한 것은 한낱 자신을 위장한 것에 지나지 않는
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것은 그의 글이 소설도 시도 아닌 단순한 인용문의 형
태를 띄고 있었는데 그런 데는 주로 외국에서 유명해진 작가나 사상가들이 나오
기 마련이었고, 설사 우리 나라 사람이 나온다고 하더라도 보통 잘 알려진 사람
이 한 말이 인용되기 여사인데 이 김동하라는 사람에 관해서는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이름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여튼 난 그와 한번 접촉해 보기 위해 우선 그의
짤막한 글이 실린 잡지사에 전화를 걸었다.
"누구요? 김동하 씨 주소요? 그런 거 이런 데서는 안 알려 줍니다."
나는 뭉툭한 잡지사 측의 말에 그만 전화 수화기를 그대로 쿵하고 내려 놓고
말았다. 그런 거, 라니, 난 이 말에서 김동하라는 인물이 평가절하되고 있는 듯
한, 내가 모욕을 당한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리고 이런 데서 안 알려 준다면
도대체 어디서 알 수 있다는 말인가? 나는 좀 막막해져 한참 그 자리에서 멍하
니 있었다.
그러고 한 서너 달 나는 그 김동하라는 인물을 완전히 잊고 지내다. 그저 가끔
해방공간이라는 말만 머리에 떠오르다 그것도 곧 잊어 버렸던 것이다. 그런데 어
느 날 난 그 잡지가 전시된 책방 앞에서 발을 딱 멈추고 말았다. 거기에 김동하
라는 이름 석 자가 쓰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난 서둘러 책방 문을 밀고 들어섰다.
자신을 해방시키지 않으면 인간은 영원히 자유롭지 못하다.
나는 지금 썩어 들어 가고 있다.
- 김 동 하 -
역시 짧은 인용문만 있을 뿐 그의 이력은 나와 있지 않았다. 다시 잡지사에 전
화를 걸 마음은 생기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나는 지금 썩어 들어 가고 있다, 라는 문장이 가슴을 찡하게
울려 와서 견딜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나도 요 몇 년간 썩어 들어가는 인생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가 분명 많이 아프다고 생각했
다. 마음뿐만이 아니라 몸마저 분명 썩어 들어 가고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서둘
러 그를 만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 잡지사의 주소를 보고 직접 찾아 갔다.
잡지사는 의외로 크고 번들거리는 곳이었다. 새로 지은 7층짜리 건물의 2층과
3층을 그 잡지사가 전부 차지하고 있었다.
"저 김동하 씨 주소나 전화번호 좀 얼 수 없을까요?"
"네?"
그렇게 친절하게 생기지도 않은 여자 사원이 볼멘 소리로 말했다.
"저어, 한 사람의 독자로서 김동하 씨 주소 좀 알고 싶어서 여기까지 찾아 왔
습니다만."
독자라는 그 소리에 앞 쪽에 앉아 있던 역시 친절하게 생기지는 못한 남자가
할 수 없다는 투로 김동하 씨의 주소와 전화 번호를 가르쳐 주었다. 난 그 김동
하 씨가 소설가인지 시인인지 아니면 어디 대학 교수인지 묻고 싶었지만 그 잡지
사의 분위기로 보아서 얼른 빠져 나가고 싶은 마음밖에 들지가 않았기 때문에 그
이상은 도저히 물을 수가 없었다.
"뚜뚜두."
통화 중이었다. 그러나 김동하 씨의 집은 그 날 내내 통화 중이었기 때문에 난
좀 짜증이 났지만 다음 날 아침에 다시 전화를 걸었을 땐 의외로 가냘픈 여자의
목소리가 먼저 흘러 나왔다.
"저, 김동하 씨 계십니까?"
"지금 안 계시는데요."
여자는 그 말뿐이었다. 김동하 씨의 부인으로 보기에는 나이가 너무 적은 목소
리였다.
"언제쯤 들어오시는데요?"
"저, 실례지만 누구십니까?"
"네에, 저, 그냥 독자입니다만."
"그러세요. 나중에 다시 한번 걸어 보시죠."
그거로써 전화는 끝이었다. 난 원래 말 재주가 없기 때문에 상대가 그렇게 말
하면 더 이상 어떤 요령도 찾아내지가 못한다. 나는 이번에는 용기를 내어 그날
밤으로 다시 전화를 걸었다.
"저어, 김동하 씨 계십니까?"
"전데요."
두 번 다시 말하고 싶지 않은 퉁명스럽기 짝이 없는 아주 귀에 거슬리는 목소
리의 남자였다. 나는 대번에 말과 손이 덜덜 떨렸다.
"저어, 독자의 한 사람입니다만, 뭐 좀 묻고 싶은 게."
난 거기까지 말하다 갑자기 말을 뚝 끊을 수밖에 없었다. 뭘 묻고 싶은지 나도
준비를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한 번 만나고 싶습니다."
"네?"
저 쪽의 목소리, 아니 김동하 씨도 좀 당황하는 듯했지만 이내,
"요즘 좀 바빠서요."
낮게 내리깐, 분명 거절하는 그 퉁명스럽기 둘 도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난 더 이상 자신이 서질 않았다. 그래서,
"에. 알겠습니다. 바쁘신데 죄송했습니다."
하고 얼른 수화기를 내려 놓고 말았다. 손에서 땀이 다 나고 입이 바짝 타는 것
같아 난 서둘러 담배를 찾아 물었다. 그 목소리로 봐서는 어디 아프기는커녕 바
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이내 난 그게 바로 김동하
씨의 위장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마음과 속병을 모두 감추는 자야말로 가장 아
픈 자라고 늘 생각해 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난 다음 날 아침 또 전화를 걸고 말았다.
"저, 어제 전화했던 사람인데요, 김동하 씨 계십니까?"
"네, 지금."
분명 있는데 못 바꾸고 있는 듯한 어제 그 여자의 목소리였다.
"전화 받는 것을 워낙 싫어해서요."
"실례지만, 김동하 씨 부인 되십니까?"
"아뇨. 동생입니다."
"그럼 김동하 씨는 결혼을 아직 안 했습니까?"
"네."
난 김동하 씨가 전화 받기를 싫어한다는 것과 아직 그가 결혼하지 않고 여동생
과 같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난 무직에 할 일도 없었기 때문에 나처럼 괴
로운 사람에게 진정한 해방공간을 제시해 줄지도 모를 김동하 씨를 직접 한번 찾
아가 만나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기야 나도 전화하고 받는 것을 누구보다
도 싫어하니까 김동하 씨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고 또 그것이 동병상린처럼 더
느껴지게 만들었다.
하필 장대 같은 여름비가 퍼붓는 날이었다. 그러나 눅진한 더위가 그 비 사이
에 집요하게 떠돌고 있어 그리 시원하지는 못한지 목에 땀이 베이고 있었다. 이
런 날에 주소 하나를 들고 김동하 씨의 집을 찾는다는 것은 여간 고역이 아니었
다. 사람들에게 묻고 물으며, 수 많은 문패를 보고 또 본 끝에 난 드디어 한글로
희미하게 김동하, 라고 쓰인 낡은 대문 앞에 서 있었다.
오후 8시. 사람은커녕 개미 새끼 한 마리조차 보이지 않는 폭우가 쏟아지는 여
름 밤에 나는 그의 좁은 대문 처마 밑에서 간신히 피를 피하고 있었지만 이미 바
지 가랑이와 앵 어깨는 축축하도록 젖어 있었다. 집에는 아직 불이 들어와 있지
않았지만 나는 이 시간에 김동하 씨는 집에 없을 것이라고 혼자 단정하고 아까부
터 무작정 기다리고만 있었던 것이다
아무도 없는 집 대문 앞에 서 있는 것도 좀 이상했지만 어디 마땅하게 갈 곳도
눈에 띄지 않았기 때문에 애꿎은 담배를 피우며 한참 동안 무작정 시간을 흘려
보내고 있었다. 저 멀리 어렴풋하게 골목의 방범등이 비치고 있었지만 내 야광
시계는 더 보이지 않았다. 완전한 어둠이 아니면 이 야광 시계라는 것도 아무 쓸
모 없다고 느낄 때가 많았다. 이제 더위가 밤비 속에서 녹아 내리면서 그렇게 덥
지 않았다.
처벅처벅. 그야말로 물소리와 함께 누군가 이 쪽으로 걸어 오고 있었다. 방범
등이 내 쪽으로 비치고 있었기 대문에 검은 윤곽 이외에는 도무지 얼굴을 볼 수
가 없었다.
그러나 그 물소리와 발자국 소리가 섞인 처벅거리는 소리가 왜 그렇게 내 신경
을 곤두서게 하는지 몰랐다. 나는 순간적으로 그게 김동하 씨이건 또 다른 사람
이건 가까이에서 마주치면 아주 기분 나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드디어 그가 내 앞에 와 멈추었다. 그는 만취되어 있어 우산을 쓰긴 썼지만 온
몸이 비에 흠뻑 젖어 있었다. 그리고 오른쪽 손에 힘없이 들고 있는 묵직하게 보
이는 가방에서도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당신 누구요?"
그 쪽에서 먼저 말을 걸었다. 난 그가 김동하 씨라고 단정했다. 자기 집 대문
앞에 서 있는 내가 좀 꺼림칙한 모양이었다. 그 때 비로소 비애 젖은 그의 얼굴
이 보였다. 바짝 마른 얼굴도 아니고 그렇다고 살찐 얼굴도 아니고 좀 네모 난
듯한 얼굴은 그렇게 사람을 휘어 잡는 인상적인 얼굴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막
연히 그냥 스쳐지나 갈 수 있는 흔한 얼굴도 아니었다.
"당신 누군데 남의 집 앞에 이렇게 서 있냐 말이야!"
김동하 씨는 말을 제대로 못할 정도로 취해 있었다. 그 틈에 그가 들고 있던
큼직한 가방이 둔탁하게 척 땅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예, 저 김동하 씨 되십니까?"
나의 이 갑작스러운 물음에 그가 눈을 번쩍 떴다.
"아니, 누군데 내 이름을?"
그의 취기가 좀 깨는 듯했지만 그건 그렇게 되어 주길 바라는 나의 생각일 뿐
이었다.
"저어, 독자의 한 사람입니다만."
"독자?"
김동하 씨는 그 때야 비로소 떨어진 가방을 다시 주어 들었는데 뭐 소중한 것
을 고이 다시 집어드는 것 같기도 했는데 그 모습이 몹시 슬퍼 보이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가 다시 똑바로 선서 말을 이었다.
"나한테도 독자가 있었나? 하하하!"
그가 걸걸한 자신을 목소리로 비웃고 있었다.
나는 김동하 씨가 분명 많이 앓고 있을 것이리라고 생각했던 것이 맞았다는 느
낌이 들었다.
"김동하 씨를 한 번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내가 그 말을 했을 때 그의 눈빛이 나를 순간적으로 쏘아 부치는 것 같아 난
약간 아찔했다.
"들어 가서 한 잔 하시겠소, 독자양반."
김동하 씨는 의외의 말을 나에게 건넸다.
그리고 그는 이 주머니 저 주머니에서 한 참 열쇠를 찾더니,
"휴, 여기 있군."
하면서 낡은 대문을 땄다.
그렇게 우리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어깨를 나란히 하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그의 집 마당은 몹시 어둡고 비좁아 난 벌써 발을 헛디디고 있었다.
"조심하시오, 독자양반."
김동하 씨는 아까부터 나를 그렇게 부르고 있었다. 독자양반? 그렇게 듣기 싫
지 않는 소리였다. 그가 다시 현관 문을 땄다. 알루미늄으로 된 현관 문이 몹시
삐꺽거리며 겨우 열렸다. 나는 어둠 속에서도 그의 집이 몹시 초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깜깜한 어둠 속에 그와 나 둘뿐이었다.
김동하 씨가 어둠 속에 불을 밝히고 어디선가 막걸리를 한 병 가지고 왔다. 그
의 방은 책으로 들러 쌓여 난 몸을 비틀어 앉은뱅이 책상 가장자리에 겨우 앉았
다.
"독자양반, 한 잔 드시오."
하면서 그가 사발에 하얀 막걸리를 콸콸 따랐다. 막걸리가 사발에서 흘러 넘치고
있었다. 그 때 내가 막걸리 병을 받아 쥐고 그의 사발에 다시 한 잔 가득 부었
다. 그는 너무 취해 있었기 때문에 나한테 말을 붙일 엄두가 나지 않는 모양이었
다.
"김동하 씨는 아직 결혼을."
"아냐, 아냐, 안 했어."
그가 말을 가로 막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독자양반은 내가 여기 사는 줄 어떻게 알았소?"
"잡지사에 가서 알았습니다."
"잡지사?"
"네."
"흥, 다 필요 없는 짓이야!"
그가 얼굴을 일그러 뜨리며 말했다.
"그 해방공간이라는?"
내가 거기까지 말했을 때 그는 나를 슬쩍한 번 올려다 보더니 술에 취한 눈이
버거운 듯 이내 눈을 앉은뱅이 책상 위로 떨어 뜨리고 말았다. 그리고는 다시 고
개를 옆으로 돌렸다. 나는 그이 눈을 따라 갔다 그이 눈이 멈춘 곳은 아까 들고
있던 비에 적은 검은 가방이었다. 아직 비에 젖어 검은 빛이 더욱 검게 보이는
아주 낡은 가방이었다. 그 안에 짐이 가득 차 있는 듯 가방이 팽팽하게 부풀어
올라 있었다. 그 가방이 놓인 방바닥에 물이 조금 고인 걸로 봐서는 가방 안에
든 물건도 분명히 물에 젖어 있을 것만 같았다.
그는 자꾸만 취해 갔다. 그가 잡지에 쓴 해방공간이라는 말에 대해서는 더 이
상 물을 수도 없었고 또 이러한 자리에서는 그리 중요한 물음처럼 생각되지도 않
았다. 단지 한 작가 이렇게 초라한 집에서 비에 자은 채 취해 가고 있다는 사실
만이 밖에서 내리는 빗소리와 더불어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다. 그것 이외에 아무
것도 필요 없었다.
"너무 취하셨습니다."
난 막걸리 병이 금방 바닥이 나자 그에게 그렇게 말했다.
"음. 그래요?"
하면서 그가 일어서려다 다시 쾅, 하고 주저앉고 말았다.
'내가 가서 한 병 더 사오리다. 여기 기다려요."
하면서 그가 다시 일어나려 했을 때,
"아니, 제가 가죠."
하면서 난 그를 말리고 일어났다.
"독자양반, 초면에 미안하오."
그의 말이 술 냄새처럼 나에게 번져 왔다.
난 우산도 없이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낡은 대문을 밀고 나왔다. 밖은 어둠과
비와 아까 그 희미한 방범등이 이제는 제법 밝게 빛나고 있을 뿐 인적은 없었다.
아까 이 골목 입구에 들어오기 전 가게가 있었던 자리까지는 거리가 제법 될 것
같았지만 나는 서두르지 않고 걸었다.
가게에서 막걸리 두 병을 사고 다시 돌아 나오려는데 웬 아가씨가 우산을 접으
며 들어오려다 나와 딱 마주치고 말았다. 나는 슬쩍 옆으로 피해 나오는데 그 여
자의 화장 냄새가 났다. 난 그대로 가게를 빠져 나와 아까 왔던 길을 다시 거꾸
로 걸어 갔다. 여름비는 거칠 줄 모르고 내리고 있었다. 다시 방범등이 있는 데
쯤 왔을 난 무심코 뒤를 돌아 보았다. 그런데 왠 사람이 뒤를 따라 오고 있었다.
낯선 거리라 난 조금 조심하면서 다시 슬쩍 뒤를 돌아 보았을 때 난 그 사람이
남자가 아니라 여자인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 여자의 손에 들린 하얀 비닐 봉
지를 보며 아까 그 가게 안에서 만났던 그 여자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여자는 계속 내 뒤를 따라 오고 있었다. 하기야 이 골목 하나뿐이니 그럴
수밖에 없겠지만 밤도 깊었고 비도 쏟아져 나는 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윽고 내가 김동하 씨 대문 앞에 섰을 때 걸어오던 저 쪽의 여자가 문득 걸음
을 멈추고 있었다. 그 때, 혹, 어제 전화를 받았던 김동하 씨 여동생, 하는 생각
이 갑자기 들어,
"저어, 김동하 씨-."
하고 말했을 때, 그 여자는 잠시 말이 없다가,
"네, 거기가 저희 집인데요."
하고 말했다. 그 목소리가 빗소리에 젖어 들어 잘 들리지 않았다.
그녀가 앞서 대문을 따고 있었다. 자그마한 그녀의 뒷모습이 애처롭게 보였다.
그녀의 집으로 들어 왔을 때 김동하 씨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
나뒹굴어진 막걸리 병, 초라한 모습의 작가, 그리고 빗소리. 나와 그녀는 둘이
그대로 얼마간 방안에 그대로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들고 온 막
걸리 봉투에서 빗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막걸리 두 병을 김동하 씨 옆에 놓고,
"그만 가 보겠습니다."
하고 말하며 현관 쪽으로 걸어 나왔다.
"죄송합니다."
그녀가 그렇게 말하는 소리를 들으며 난 다시 비가 쏟아지는 골목길로 나왔다.
시원했다. 빈 속에 먹은 막걸리가 달아 오르고 있었다. 그녀는 어딘가 모르게 다
소곳한 그리고 좀 지친 모습이었다. 나는 자꾸 떠오르는 그녀의 모습을 애써 지
우려하면서 아까 그 가게가 있는 곳에 다시 들어가 막걸리 두 병을 다시 샀다.
그리고 큰 길로 나와 버스 정류장을 찾기 시작했다.
김동하 씨는 지극히 냉소적인 자학적인 사람이었다. 인생에 지친 사람. 난 그
와 몇 마디 이야기도 주고 받지 못했지만 다시 그를 한 번 만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난 대학을 졸업하고 몇 달 직장 생활도 해 보았지만 견디지 못했다.
그래서 그만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돈이 떨어지면 난 다시 무엇이든 해야만
할 처지였다.
"김동하 씨는 좀 괜찮습니까?"
난 다음 날 그녀의 전화를 걸었다.
"네, 오빠가 미안하다고 하면서 나갔습니다만."
"혹시 어디 가신 줄 아십니까?"
난 쓸데없이 자꾸 묻고 있었다.
"네, 그건."
그녀는 망설이고 있었다. 대답하기가 곤란한 듯해서 난 더 이상 묻을 수가 없
었다. 나는 우리 집 전화 번호를 가르쳐 주고 전화를 끊었다.
김동하 씨는 글 쓰는 것 말고는 다른 직업은 없었다. 잡지사라도 간 것일까?
그의 행색이나 집으로 봐서 그리 돈은 못 버는 것 같았다. 하기야 요즘 누가 책
을 읽는가.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글이나 요란한 선전으로 장식된 글이 더 판을
치고 진정한 글들은 사라진다. 누가 그걸 옳게 판별할 줄을 모르니 나 자신도 책
방에 가 볼 때나, 신문 광고나 서평 따위를 볼 때 한숨부터 나오지 않던가. 그리
뛰어 나지도 않는 글을 마치 최고의 지성적인 문학적인 글처럼 평가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한여름의 무더위가 다시 찾아 온 그날 밤, 난 김동하 씨의 전화를 받았다.
"이 보시오, 독자양반. 지금 이리로, 나오시오, 내, 한, 잔, 살, 테니까."
그는 벌써 많이 취해 있었다. 어제처럼 말도 제대로 못하고 있었다.
그가 만나자고 한 곳은 그의 집 골목길 어귀 허름한 대폿집이었다.
내가 들어 갔을 때 그는 거의 막걸리 병에 머리를 처박다시피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대폿집 안에 쾨쾨한 공기 때문인지 난 가슴이 답답해 왔다.
"김동하 씨."
나는 그의 어깨를 가볍게 흔들며 자리에 앉았다.
"아, 독자, 양반."
그는 다짜고짜로 자기가 마시던 막걸리 사발을 비우고 나에게 내밀며 거기에
다시 한 잔 죽 따랐다. 희뿌연 막걸리가 사발 안에서 작은 소용돌이를 치고 있었
다. 난 그걸 받아 단숨에 벌컥벌컥 삼키고 다시 그에게 한 잔 가득 부어 주었다.
그 때, 그가 사발을 잡은 채,
"이 안에 든 게 뭔 줄 아시오?"
하고 취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 보며 말했다. 그가 앉아 있는 나무 의자 옆에는
어제 보았던 그 비에 젖은 가방이 놓여 있었다.
그가 가방을 풀기 시작했다. 아직까지도 그 가방은 비에 젖어 있는 듯 보였다.
이윽고 그 가방에서 나온 것은 책이었다. 그는 나에게 그걸 내밀었다.
야만의 풍습
김 동 하
김동하 씨의 중, 단편소설집이었다. 그건 아직 눅진했다. 나는 그 때 비로소
그의 책을 처음 보았다.
"독자양반, 아니 이름이 어떻게 되시오?"
"박철민입니다."
"아, 그래 박형, 박형이 그거 한 권 사시오."
나는 뜻밖의 그의 행동에 조금 당황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의 책을 한 권
사는 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김동하 씨가 다음 말을 했을 때 난
더 황당했다.
"나 책 장사요."
김동하 씨는 그렇게 말을 내뱉고는 얼른 막걸리를 사발을 벌컥 들이켰다.
"난 책을 판단 말이오. 그것도 내 책을 내가, 하하하."
김동하 씨가 무슨 말을 하는지 난 알아 들을 수가 없었다.
"소설가가 글을 써서 얼마나 벌어 먹고 살 수 있다고 생각하시오? 우리 나라
에 소설가 한 오 백 명쯤 되는데 독자양반, 아니 박형이 알고 있는 소설가가
몇 사람이나 되오? 지금부터 죽 한 번 말해 보시오."
그는 그렇게 말을 내뱉고는 다시 막걸리를 죽 들이켰다. 그리고 다시 자기 잔
에 손수 따르려고 했으나 막걸리가 조금 흘러 나오다 바닥이 나고 말자,
"어이, 아주머니! 여기 막걸리 한 되요."
하고 소리를 질렀다.
난 그가 주문한 대로 알고 있는 소설가의 이름을 읊조려 보았다. 이문열, 최인
호, 김진명, 또, 또. 나는 금방 막히고 말았다.
"그 보시오, 박형, 박형이 아는 소설가 열 명이라 칩시다. 그러면 나머지 490
명의 소설가는 이름마저 지워진 채 책도 팔리지 않고 죽고 있는 것이오, 그 사
람들이 글을 쓰면서 어떻게 먹고 산다는 말이오. 이 시대는 1930년이 아니오,
그런데 그 때 작가들이나 지금이나 상황은 하나도 변한 것이 없소. 그러나 차
마 자기 자식과 마누라와 부모 앞에서 죽지 못해 택시 운전 기사나 책 외판원
을 하면서 먹고 사는 것이요. 알겠소. 난 말이요, 아이들 책이나 전집, 백과 사
전을 파는 책 외판원 대신에 내가 쓴 내 책들을 이리저리 팔며 돌아 다니고 있
는 것이오. 알겠소? 이 학교 저 학교, 이 거리 저 거리로 가서 돗자리 위에 똑
같은 책 야만의 풍습을 펴 놓고 하루종일 기다리는 것이요, 그러다 보면 한,
두 권을 팔리니까 이 막걸리 값은 되지, 하하하."
김동하 씨는 신중히 말했다가, 격앙 되었다가, 화를 내다 하면서 결국 호탕하
게 웃으며 말을 맺었다. 나는 좀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그의 해방공간이라
는 글을 읽고 반해 찾아 간 작가가, 이렇게 책을 팔아 겨우 막걸리로 하루를 때
우는 작가라고는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난 연거푸 막걸리를 따라 마셨다.
그런 나를 제지한 것은 김동하 씨였다.
"작가라고 뭐 별 것 있는 줄 아시오. 아무리 좋은 작품을 써도 팔리지 않는
세상에. 하기야 내 글은 문학성이 사라진지 오래니까. 하하."
나는 아까 한 권 내 놓은 야만의 풍습이라는 책 제목만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
다. 야만의 풍습, 무엇을 야만의 풍습이라고 쓴 것일까?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막걸리와 김동하 씨와 더불어 차츰 취해 가고 있었다. 나도 벌써 세 되째 막걸리
를 마시고 있었다.
김동하 씨는 이제 몸을 잘 가누지 못 할 정도로 취해 있어 이야기도 잘 되지
않았다. 나는 그에게 이제 그만 마시라고 이야기했지만 그는 자꾸 술만 찾았다.
그것이 마치 그에게는 전부인 것 같은 패배주의가 그의 몸에서 그의 술 잔에서
넘쳐 흐르고 있었다.
나는 그가 취해 고개를 숙이고 있을 때 야만의 풍습을 좀 펴 보았다. 글자는
눈에 들어 오지 않아 이리저리 책장만 너며 보았는데 제일 마지막 장에 책값이
5000원이라고 적힌 곳에 눈이 멈추었다. 5000원. 하루에 두 권 팔면 만 원, 한
달이면 삼십 만 원. 돈도 아닌 돈이었다. 아무래도 그의 집은 그의 여동생이 꾸
려 나가는 듯했다.
우리는 12시가 다 되어서 그 대폿집을 나왔다. 거리가 어두워져 있었다.
"박형, 어디로 갈 거요? 우리 집에 가서 한 잔 더 합시다!"
김동하 씨가 비틀거리며 말했다. 그는 몹시 취해 있었기 때문에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어제와 같은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의 집에 가서 마신다면 그는 역
시 어제처럼 꼬꾸라질 것이다.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싶지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예에."
하고 대답하며 그를 데리고 어제의 골목길을 걸었다. 그리고 어제의 낡은 대문을
두드렸는데 이상하게 갑자기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그의 여동생이 나왔다. 그녀는 역시 피로한 모습이었다. 난 죄송합니다, 하고
말하고 김동하 씨를 부축해 집 안으로 들어 갔다. 방에 들어 가자 그녀가 일다
만 책이 펴져 있었다. 김동하 씨는 그 책 위에 다시 꼬꾸라지듯 넘어졌다.
"이 봐, 박형. 앉아. 앉으라구."
그가 그렇게 말하고 있었지만 더 이상 술을 마실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 쓰
러지는 모습이 내 가슴을 저리게 만들고 있었다. 해방공간을 찾는 작가가 슬프게
외치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그를 어떻게든 도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녀에게 약간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죄송해요. 어제도."
"아닙니다. 제가."
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리고는 그만 가 보겠다고 하며 그 집을 빠져
나왔다. 그녀가 대문 앞에 서 있었다. 나는 어둠 속으로 빨리 모습을 감추었다.
더운 한 여름 밤이었다. 등 뒤에서 탁, 하고 닫는 소리가 들렸다.
다음 날 저녁, 어제와 비슷한 시각에 김동하 씨의 전화가 다시 왔다. 이번에는
이야기나 좀 하면서 한 잔 하자고. 어제보다는 확실히 덜 취해 있었지만 벌써 몇
사발은 마셨을 것 같은 목소리였다.
"에."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엉거주춤 옷을 갈아 입었다. 그러면서도 마음은 가볍지
가 않았다. 약속 장소는 어제의 그 대폿집이었다. 사실 거기는 다른 술집과는 비
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쌌다. 막걸리와 막안주가 전부였지만 그렇게 싫지만은 않
는 곳이었다.
"어이, 박형."
나는 김동하 씨가 이렇게 밝게 나를 부른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더위가 좀
가시는 느낌이었다.
"안녕하십니까?
나도 밝게 말했다.
"오늘은 박형이 먼저 취할 테니까 두고 보시오."
김동하 씨가 빈 사발을 하나 더 시켰고, 나에게 막걸리를 콸콸 따랐다. 잔이
가득 차 오르고 있었다.
"내 오늘은 무려 네 권이나 팔았다오."
김동하 씨는 빙그레 웃고 있었다.
나는 어제 밤부터 생각했던 이야기를 슬그머니 끄집어 내었다.
"그 책 장사 저와 동업하시죠?"
김동하 씨의 표정이 흐려지고 있었다.
"그건 안 되오."
단호한 목소리였다.
나는 그가 한 말의 의미를 알아 보려고 애썼다.
돕겠다고? 누가 누구를 돕는다는 말인가? 난 내 처지가 우습게 여겨졌다.
다음 날 아침, 나는 숨어서 김동하 씨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그의 처진 어깨가 나를 피곤하게 만들었다. 이윽고 그는 00대학 정문 앞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멈추었다. 그리고 그 검고 낡은 가방을 어깨에서 내려
놓고는 비닐 자리를 깔고 그 위에 책들을 풀어 놓기 시작했다.
나는 어쩐지 점점 침통한 느낌이 들었다. 한 작가가 자신의 책을 직접 팔러 나
서야만 먹고 살 수 있다는 사실. 좀 더 위대하고 고상하고 낭만적인 모습을 늘
작가에게 기대했던 것이 여지 없이 무너지고 있었다. 저렇게라도 살아야 된다는
것이 이 시대의 사는 방법이었다.
벌써 두 시간이 지났지만 김동하 씨는 아직 한 권의 책도 팔지 못하고 있었다.
초조한 것은 오히려 나였다. 김동하 씨는 담배도 피우고 신문도 보고 하면서 시
간을 때우고 있었지만 난 좀 지루하고 안달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제 그에
게로 다가가지 않으면 안 될 시점이었다.
"안녕하세요? 김동하 씨."
내가 그 말을 던지며 그에게 모습을 나타냈을 때 당황한 쪽은 김동하 씨였다.
그는 자신이 책을 팔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밝혔지만 막상 그 모습이 들통이 나
자 몹시 당혹스러운 듯했다.
저녁이 되도록 책은 한 권도 팔지 않고 날씨는 무더웠다. 김동하 씨도 내가,
"자, 책이오, 책. 유명 작가 김동하 씨의 야만의 풍습, 5000원입니다."
하고 부르짖는 것을 더 이상 말리지 않았다. 이렇게 된 바에야 할 수 없다는 투
로 나와 김동하 씨는 동업 아닌 동업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날 따라 이상하
게도 책은 한 권도 팔리지 않았다. 간혹 대학생들이 힐끗 책을 쳐도 볼 뿐 그들
은 책이 펴진 곳 앞으로는 결코 다가서지 않았다. 난 속으로 안 읽어도 너무 안
읽는 군, 하는 생각 들었지만 그들은 책 제목만 옆 눈으로 살짝 째려볼 뿐이었
다. 사려면 사고 안 사려면 안 살 것이지, 책 제목은 왜 그렇게 슬쩍 보려는지
저게 다 요새 말하는 정보를 캐치하는 것이리라. 웃기는 이야기지, 하는 생각마
저 들었다. 어떤 여학생은 내가 책 사세요, 하면 빙그레 웃으며 내 몸을 아래
위로 쳐다보고만 갈 뿐이었다. 내 옷에 뭔가 묻은 것도 아닌데, 아무래도 야한
년이 아닌지 짧은 치마바람도 그렇고, 하고 생각했지만 확실한 것은 도모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다 나중에는, 하기야 보통 학생들이라면 5000원도 큰 돈일 것
이라고 생각했다. 요즘 다 살기가 어렵지 않는가. 제 부모들은 허리가 휘어지며
저들을 대학에 보내고 있을 것이다. 하루에 용돈 5000원을 주면 한 달에 15만
원이고, 하루에 용돈 만 원을 주면 한 달에 30만 원이니 그것도 그들 부모에게는
부담이 되는 큰 돈일 것이고, 또 학생들도 그 가운데 5000원을 선뜻 쓰기에 마음
이 켕길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러나 책에 관심이 없어도 너무 없어 보이는 것
만은 분명하게 느낄 수가 있었다. 영어 문제집은 사도 소설은 책은 거의 사지를
않는다. 설사 산다고 해고 신문이나 텔레비전에 자주 이름이 요란하게 선전되는
작가의 책만 베스트셀러가 되고 팔리니, 언젠가. 나도 그런 책을 읽어 보았지만
김동하 씨의 소설보다도 못한 것이 더 많았다. 또 학생들은 책을 보러 다가올 듯
하다가도 혼자 그런 곳에 앉는다는 것 행위를 겸연쩍고 어색해 하는 것 같았다.
뭐가 어색하고 두렵다는 말인가. 자기 보고 싶으면 다가서서 보고 안 좋으면 안
사면 그만일 텐데, 그들은 거저 망설이는 마음으로 가까이 다가와서 앉는 것조차
하지를 못했다. 다른 사람들은 지독히 의식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난 이래 가
지고서야 무슨 민주주의 시대에 개성과 자아를 꽃 피운다는 말인가, 모두가 바보
같다, 모두가 병신 같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도 남을 무시하고, 침을 뱉고
욕을 하고 민주주의를 외치며 통일을 외치며 데모를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자신
하나도 주체하지 못하면서, 나의 생각이 비약하고 있었지만, 하루에 두 권은 판
다는 김동하 씨의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밤이 다 되도록 한 권도 팔리지 않았다.
"오늘 이거 한 권만이라도 팔아야 박형에게 대포 한 잔 살 수 있을 텐데 말이
야."
김동하 씨가 말했다.
"아니, 제가 사죠. 걱정 마십시오."
그러나 내 주머니에도 돈이라곤 돌아갈 버스 차비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아니, 아니야. 무슨 소리."
김동하 씨는 자못 진지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밤이 깊어지고 있었고 어디선가 시원한 바람이 물기를 머금고 불어오고 있었
다. 긴 더위 끝에 소나기라도 뿌리려는 듯한 바람이었다.
한 방울, 두 방울,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거리에 인적이 끊기고 있었다.
"비가 오려는 모양인데 그만가시죠?"
나는 아까부터 침통하게 앉아 있는 김동하 씨에게 말했다.
"아니야, 좀 더 있어 봐."
김동하 씨는 아예 지그시 눈을 감아 버렸다.
이제 빗방울이 굴어지고 있는가 싶더니 느닷없이 소나기가 퍼붓기 시작했다.
난 어쩔 줄을 모르고 이리저리 뛰며 책을 덮으려고 했지만 덮을 만한 것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김동하 씨! 김동하 씨! 책이 다 젖습니다!"
하고 외쳐 보았지만 그는,
"놔 둬! 놔 두란 말이야!"
하고 큰 소리를 질렀다.
나는 책을 가방에 닥치는 대로 집어 넣었지만, 김동하 씨는 그런 내 팔을 붙잡
으며,
"놔 둬! 그대로 나 두란 말이야!"
하고 소리를 질렀다.
"아니, 왜 그러십니까!"
"이까짓 것 다 놔 두란 말이야!"
하고 김동하 씨가 내 어깨를 흔들며 뒤로 밀치는 바람에 난 뒤로 쾅 나자빠졌다.
나는 그대로 잠시 땅바닥에 옆으로 누워 있었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김동
하 씨가 왜 저러는지 묻고 싶지도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한 순간 모든 게 허
망하게만 생각되었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바로 눈 앞에 펴 놓은 책들이
물에 잠기고 있었다.
바로 그때, 밤색 구두를 신은 여자가 그 책들 앞에 멈추었다. 우산을 든 여자
는 이 비오는 밤에도 선글라스 낀 채 머리에는 흰색 스카프를 쓰고 있어 도무지
얼굴은 볼 수가 없었다.
나는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어서 오십시오?"
하고 말했다. 그 때 김동하 씨가,
"필요 없어요! 저리 가요! 안 판단 말이요!"
하면서 비에 젖은 가방을 열려던 내 손을 움켜 잡았다.
"한 권만 주세요?"
여자는 말했다. 여자의 말이 너무나 애처롭게 들렸다. 그 여자의 소리는 순간
적으로 김동하 씨를 그대로 꼼짝도 못하게 묶어 놓았다. 김동하 씨는 가로수 쪽
으로 고개를 떨군 채 등을 돌렸다.
여자가 좀 당황한 듯, 손으로 입을 막고 이야기를 했으므로 목소리는 거의 들
릴락 말락 했다. 여자가 5000원짜리 지폐를 나에게 내밀었다. 아마도 5000원이
라고 써놓은 비에 젖은 종이를 보고 5000원을 그냥 준 것 같았다. 나는,
"책이 비에 좀 젖었는데요."
하면서 아까 가방 안에 넣었던 비에 덜 젖은 책을 한 권 그녀에게 건넸다. 그녀
는 그 책을 받자마자 부리나케 사라져 버렸다. 너무나 재빠른 동작에 나는 잠시
그녀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는데. 그런데 이상하게도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그마한 그녀의 뒷모습이 애처롭게 보였다. 바로 그
순간, 나는,좀 이상한 생각이 들었지만, 설마, 하며 고개를 흔들었다.그러면서도
쏟아지는 빗속으로 사라지는 그녀를 다시 한번 더 바라 보았
다.
"이봐? 뭘 그리 쳐다 보고 있어? 우리 말이야. 이걸로는 안주 값까지는 안 될
테니까 막걸리나 다섯 병 사 가지고 우리 집에 가서 신나게 마셔 보자구, 하하
하."
김동하 씨는 아까와는 달리 거의 자학적인 모습으로 그렇게 말을 내뱉고는 빗
물이 뚝뚝 떨어지는 책들을 마구잡이로 가방 안에 쑤셔 넣고는, 깔았던 비닐 자
리를 가로수에 툭툭 털고 있었다.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김동하 씨와 다투기까지 해가며 하루종일 앉자 있었던
터라 나도 목이 탔다. 나는 그의 제의를 거절할 수가 없었다. 우리는 막차인 듯
한 버스를 한참 만에야 겨우 집어 타고 김동하 씨의 집으로 향했다.
"또 폐 끼치게 됐습니다."
나는 김동하 씨의 여동생이 막걸리와 안주를 차린 상을 들고 오는 것을 보며
그렇게 말했다.
"폐는 무슨 폐. 이봐, 이거 한 잔 받으라구."
하면서 김동하 씨가 부리나케 막걸리 병을 땄다. 김동하 씨의 얼굴이 환해져 있
었다. 그러나 그건 술 앞에서 모든 시름을 잊으려는 자의 기쁨에 지나지 않았다.
바로 그 다음은, 곧 슬픔이 자리하게 되는 자의 얼굴이었다. 그 때 그녀가,
"차린 게 없어서."
하고 말했다. 그녀의 모습은 오늘 따라 더 말쑥해 보였다. 나는 아까 책을 샀던
여자가 그녀가 아닐까, 했던 내 생각이 틀렸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가볍게 고개
를 숙이며 방을 나갔다.
"이봐, 자네 혹 우리 동생한테 마음 있는 거 아냐? 뭘 그리 생각하는 거야.
하하하."
하고 김동하 씨는 억지로 농담을 걸고 있었다.
나는 갑자기 담배를 피우고 싶어졌다. 그런데 아무리 주머니를 뒤져 봐도 라이
터가 잡히지 않았다. 그걸 보고 있던 김동하 씨도 담배를 하난 빼어 물고는 음,
가만 있자, 라이터가 어디 있더라, 하면서 일어서려다가,
"라이터가 다 어디 갔지, 자네 뒤 탁자 밑에 한번 찾아 봐."
하고 말했다.
나는 어깨를 틀어 뒤에 있던 탁자 밑을 찾기 시작했다. 깡통으로 된 연필 통과
잡동사니와 신문들만 보일 뿐 라이터는 잘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무심코 신문을
빼내 보았는데, 그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거기에는 흰색 스카프와 선글라스가
나란히 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것들은 아직도 비에 젖은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
바로 그 때 김동하 씨가,
"아니, 라이터 여기 있잖아."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난 고개를 떨군 채 비에 젖은 스카프와 선글라스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
었다.
-끝- 1996. 8. 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