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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국
..................김 영 관(소설가)
1.
눈발이 몰아치는 사할린. 1940년 겨울.
여기에 온 지도 벌써 2년이 지났다.
내 나이 스물 하나.
내선일체라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 일본 왕에게 보은하고, 일본에 보국하기 위
해 우리들은 이렇게 끌려왔던 것이다.
그냥 가는 게 아니라 돈도 벌 수 있다고 왜놈들은 우리들을 교활하게 속이며
끌어가고 있었다.
그 때 나는 열 아홉 살로 장남이었다.
마흔이 넘은 어머니는 땅바닥에 주저앉아 울고 불고, 얼굴이 새카맣게 야윈 아
버지는 소리 없는 눈물을 줄줄 흘리고 계셨다.
허리에 일본도를 찬 왜놈 순사와 왜놈 앞잡이 이원택이 나의 등을 세게 밀어제
끼고 있었다.
나보다 한두 살 많을까 한 이원택은 눈이 옆으로 쪽 째지고, 배싹 마른 얼굴에
키가 컸다. 그와 나는 읍내 소학교를 같이 다녔지만 그 때부터 그는 나를 괴롭히
는, 못된 놈이었다. 내가 모아 모아둔 돈을 꾸어가서는 갚지도 않았고, 우리 집
포도를 마구잡이로 따갔고, 못된 주먹질을 나에게 곧잘 퍼부었다.
나는 그 놈 때문에 하교 가는 것이 참으로 싫었다. 숫기가 없는 나를 그 놈은
졸졸 따라다니며 괴롭혔다. 그야말로 진드기 같은 놈이었다.
칼을 차고 들어오는 왜놈 선생 앞에서 그 놈은 한여름이면 늘 찬 수건을 제일
먼저 갖다바쳤고, 겨울이면 어디선가 많은 장작을 구해와 혼자서 난로를 지켰고,
왜놈 선생의 책상과 의자는 도맡아 싹싹 닦던 놈이었다.
그런 그 놈이 면사무소에서 사환을 한다고 껄떡거리더니만, 어느새 이 곳 왜관
지서에서 왜놈 앞잡이로 행세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놈 손에 끌려간 우리 마을 사람도 벌써 열 명이 넘었다. 그 중에는 우리 옆
집에 살던 순이도 말로는 돈벌러 만주에 있는 무슨 공장으로 간다고 했지만, 그
정신대라는 것이 나중에 알고 보니 왜놈 군인들에게 몸을 파는 것이었다.
또 징용된 사람들 가운데는 3·1독립만세운동 때 이 마을에서 앞장섰던 그 놈
의 삼촌도 끼여 있어, 그 놈은 왜놈 순사 다나까의 신임을 톡톡히 받고 있었다.
그런 그 놈이 이번에 나를 찍은 것은 벼르고 있던 내 여동생 혜민이를 저에게
주지 않는다는 것 때문이었다. 그야말로 삵쾡이처럼 교활한 놈이었다.
그 놈은 우리 집에서 내가 아니면 이제 겨우 열 여섯인 막내 승혁이라도 끌고
가려던 놈이었다.
나는 고향 생각이 자주 났다. 어머니와 아버지도 보고 싶고, 동생 혜민이와 승
혁이도 보고 싶어 자꾸 눈물이 솟구쳤다. 배고픔도 지독했고, 이곳 탄광의 막장
일은 참으로 말로 다 못할 중노동이었다.
갱도 곳곳에는 끌려온 징용자들이 돌이나 못으로 '어머니 배가 고파요' 하고 긁
어놓은 글씨가 쓰여 있었다.
고양이 밥보다 못한 밥.
동물을 사육할 때 쓰는 듯한 긴 채찍을 든 왜놈 감독들을 새벽 6시부터 우리들
을 후려갈겨 깨웠다. 그 놈들 가운데 이노우에는 악명을 떨치고 있었다. 눈물도
피도 없는 녀석.
거무틱틱한 피부에 짙은 눈썹, 얇은 입술, 작달막한 키에 이노우에는 고무 장화
를 신고 우리 조선인 징용자들을 마구잡이로 부리고 있었다.
우리들은 이미 돈을 받고 일하는 노동자들이 아니었다. 그나마 몇 푼 받은 돈
도 이 놈들에게 밥값이니 보관비니 하면서 뜯겨 나갔고, 나머지 돈도 우리들 손
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왜놈들이 맡아두고 있었다.
돈 보다 몸이 견디지 못했다. 배고픔과 추위, 병마가 우리를 늘 휩싸고 있었다.
나와 같이 부산에서 시모노세키를 거쳐 일본 최북단의 섬 이곳 사할린 까지 같
이 온 최학도는 탄광 생활을 견디다 못해 탈출을 시도하다 사냥개 같은 이노우에
의 손에 발가 벗긴 채 이노우에의 채찍에 맞아 죽었다. 이노우에는 개 잡듯 최학
도를 갈기고 나서 피투성이에 의식도 없는 최학도의 얼굴을 물 속에 집어넣었다.
우리는 처음에 정신을 차리게 하려고 그러나 보다 싶었지만, "고노 바까야로!"
하면서 이노우에는 오랫동안 최학도를 물 속에서 끄집어 낼 줄 몰랐다.
우리 징용자들은 벌벌 떨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그저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
다. 그게 최학도의 최후였다. 개처럼 축 늘어진 인간의 시체. 그에게도 부모가 있
고 아내와 아이들이 있는 인간이었지만, 그는 이 동토에서 동물보다 못하게 살다
죽어갔다.
최학도는 늘 가족들을 누구보다도 그리워했다. 순박한 조선의 한 촌부가 왜놈
들 손에, 왜놈들 탄광에 끌려와 비참하게 죽어갔다.
이노우에는 일부러 작업까지 중지시키고 우리를 앞에서 탈출자의 최후를 보여
주는 것이었다.
개새끼.
이노우에가 최학도를 냇물에서 끄집어 냈을 때 나는 그의 번득이는 이빨을 보
았다. 그리고 이노우에는 그 입으로, "쵸센징 (조선인), 바까야로 (멍청한 이 새
끼들) !" 이라는 소리를 내뱉었다.
나를 동생처럼 생각 하며 자신도 모자라던 밥을 나에게 더 나누어주던 최학도
의 시체를 바라보며 나는 이노우에에게 복수할 것을 결심하며 이를 갈았다.
'두고 보자, 이 쪽발이 이노우에 새끼'
이 곳 탄광에는 막사가 두 개 있었고 50명 정도씩 나누어져 있었는데, 대부분
이 우리 조선인들이고, 중국 사람과 돈을 벌러온 일본인도 서넛 있었다.
참으로 고향 외양간만 못한 막사였다. 돼지우리보다 더 더러운 냄새가 코를 찔
렀고, 거지도 덮지 않을 만큼 헤진 담요와 옷.
온기라고는 우리들의 체온과 조그만 석탄 난로 하나 뿐이었다. 둘씩 부둥켜 안
고 자지 않으면 도저히 북극의 겨울을 날 수 없었다. 주전자에 떠놓은 물마저 새
벽이면 꽁꽁 얼어 있었다.
새벽 6시 기상.
일본인 감독들이 외치는 고함 소리에 눈을 겨우 뜨면 어둠도 가시지 않은 꽁꽁
얼어붙은 개울가로 가서 얼음을 돌로 깨고 겨우 고양이 세수를 했다. 그때마다
얼어붙은 얼음이 우지직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단무지 몇 조각과 주먹밥으로 아침을 때우고 우리들은 죽음의 행렬처럼 막장
속으로 끌려갔다.
거기 한번 들어가면 오후 4시가 될 때까지 우리는 햇빛을 볼 수가 없었다.
지하 깊숙한 막장 속은 춥지는 않았지만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을 만큼 공기가
희박했고, 또 석탄 먼지로 뒤덮여 있어 우리 조선인 징용자들은 모두가 폐를 앓
고 있었다.
2년을 하루 같이 곡괭이로 탄더미를 캐내면서 차라리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고향과 부모에 대한 연민은 모진 것이었다. 죽어도
봄이면 다시 싹이 트는 풀처럼 꺾여 죽을 수 없는 생명이었다.
사할린의 이 겨울은 언제 끝날 것인지, 눈보라가 연일 세차게 치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막장까지는 좀처럼 들어오지 않던 이노우에(갱도 붕괴 사고가 많았기 때문에
제 목숨 아까운 줄은 아는 이노우에는 갱도 입구까지만 들어오는 게 고작이었다)
가 채탄량이 적다는 욕을 먹어 선지 굳은 얼굴로 막장 안에 들어와 우리들에게,
"너희들 쵸센징 잘 들어라. 요즘 채탄량이 많이 떨어졌다. 주는 밥, 주는 돈 받
고 게으름 피우는 너희 쵸센징. 오늘은 그 버릇을 고쳐주마!"
하고 말하며 채찍을 두 번 땅바닥에 내리쳤다.
이노우에의 입에서는 지독한 술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이봐 기무(일본인 감독들은 우리들의 성만 따서 일본식으로 그렇게 부 르
고 있었다), 넌 왜 아까부터 내 눈치만 보는 거야! 바까야로!"
이노우에는 그렇게 말하며 느닷없이 채찍으로 내 등을 내리쳤다.
쩍―. 정신이 아찔하도록 등이 아파왔다. 이 제3구 막장 안에는 나와 마흔이 넘
은 이병렬과 이노우에 셋뿐이었다. 제일 깊이 들어간 막장이어서 워낙 좁아 작업
인부는 늘 둘, 셋이 고작이었다. 그리고 사고도 제일 많은 곳이라, 모두 이 제3구
막장을 피하려고 했지만 나는 늘 도맡다시피 여기서 석탄을 캤다. 순전히 이노우
에의 지시였기에 어쩔 수가 없었다. 늘 일본인 감독들 앞에서 굳은 얼굴로 한마
디 말도 하지 않는 내가 그들의 눈에는 몹시 거슬린 모양이었다. 말없는 반항, 침
묵의 반항쯤으로 여기는 모양이었다.
일이 이쯤 되면 입을 다물고 있는 게 상책이다. 나는 더 열심히 곡괭이로 탄더
미를 찍어 내고, 이병렬은 삽으로 석탄을 수레에 싣고 있었다.
바로 그 때였다.
이노우에가 두 번째 채찍을 높이 들고 후려치는 순간, 채찍이 위쪽 받침 갱목
에 걸리고 말았다. 이노우에는 식식 거리며 무리하게 그걸 잡아 끌어내리는 찰라
우직, 하고 소리를 내며 받침 갱목이 내려앉고 있었다.
"위험해! 그만둬!"
이병렬이 이노우에의 채찍을 제지하고 말고도 없이 쾅, 하고 산더미 같은 탄더
미가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나는 막장 끝쪽으로 몸을 엎드렸고, 이노우에와 이병렬은 탄더미에 깔린 듯했
다.
암흑.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두려움에 가슴이 조여들어 터질 것만 같았다. 내가 지금 눈을 뜨고 있는
것인지 깜고 있는 것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었다. 답답하고 메케한 공기가 입으로
꾸역꾸역 빨려드는 것 같았다.
잠시 후, 나는 이노우에와 이병렬의 신음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아. 아직 살아 있다. 나는 폐쇄 공포로부터 조금은 벗어나는 듯했다. 깜깜한 밤
허공에 뜬 것처럼 나는 한발 한발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아갔다.
누구의 손인지 나와 손바닥을 맞잡았다. 이병렬이었다. 허리 밑으로 탄더미가
깔려 있는 것 같았지만, 겨우겨우 그를 빼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때,
"타스케떼…(살려 줘)."
이노우에의 떨리는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났다.
우리 셋은 한 평 남짓한 막장 속에 갇혀 있었다. 갱도가 무너진 것이다. 이병렬
은 다리를, 이노우에는 허리를 다쳐 신음 소리를 연신 내고 있었다.
암흑 속에서 저들의 신음 소리는 오히려 위안이 되었다.
이노우에는 하반신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기무, 기무." 하면서 내 이름
을 자꾸 불렀다.
그는 죽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에 대한 복수심이 어느 새 사라지
고 있었다.
다리가 접힌 이병렬은 이제 아픈 다리보다도 이 어두움과 죽음을 두려워 하고
있었다.얼마나 지났을까?
목이 탔다. 그건 이노우에나 이병렬도 마찬가지였다. 하루가 지났는지 이틀이
지났는지 도무지 시간 개념을 느낄 수 없는 절대절명의 암흑.
나는 허리를 반쯤 숙이고 오줌을 내 두 손에 받았다.
한 모금. 꿀보다 더 단 생명수였다. 나는 그것을 또 이병렬의 입에 한 모금 넣
어 주었다.
그리고 이노우에….
내 오줌을 나는 그의 입에 갔다대었다. 이노우에가 쭉쭉 빨아 먹었다.
"아리가또우(고마워)…."
나는 그가 죽을 것이라 생각했다.
나흘만에 나와 이병렬은 산 송장이나 다름없는 모습으로 탄광을 나왔다.
이병렬은 결국 썩어 들어가기 시작한 다리를 잘라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나마
목숨을 부지한 게 다행이었다.
영양실조와 탈수증을 회복한 나는 한 달만에 다시 그 막장 안으로 돌아와야 했
다.
이 사할린에도 봄이 오고 있었다.
계곡과 냇가에도 물 흐르는 소리가 졸졸졸 들려 왔다. 그러나, 이 징용자 탄광
은 그런 봄을 느끼기엔 너무나 삭막하고 가슴을 짓누르는 암울함이 늘 가시지 않
았다.
복수를 다짐했던 이노우에는 그렇게 사라졌지만, 강제 징용 일은 끝나지 않았
다.
1941년의 봄이었다.
왜놈들이 만주까지 삼켰다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그것은 아득한 먼 곳의 일이었
다.
그 동안 고향의 집과는 딱 한 번 편지가 오고 갔다.
여동생 혜민이가 또박또박 적은 글이었지만 막내 승혁이에 대한 이야기는 어디
에도 없었고, 또, 아버지가 아무래도 성치 않은 듯했다. 조금 몸이 편찮다는 글귀
였지만, 젊은 사람 못지않던 아버지가 그렇다는 것은 아무래도 무슨 병이 났음에
틀림없다는 생각이 내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다. 소작으로 일구는 논과 밭뙈기는
세 식구에게 여간한 일이 아닐 것이라 생각하면, 눈물이 줄줄 흐르는 것이었다.
아버지, 어머니, 호강 한 번 못 시켜드리고, 손자 보실 나이에 난 아직 장가도
못 갔고, 혜민이도 시집갈 나이나, 형편이 그렇고, 나는 여기서 벙어리 냉가슴만
앓고, 하루하루 제 목숨 연명하기에 바쁜 것이었다.
거의 매일 여기서는 한 사람의 송장이 실려 나갔다.
탄광 사고와 영양실조와 병마가 늘 징용자들을 휩싸고 있었다.
살아남아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것. 그것만이 유일한 목표였다. 2년이면 끝날 것
이라던 탄광 일도 벌써 3년을 넘기고 있었다.
매일 매일 땅굴 속으로 기어드는 벌레 같은 생활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언젠가는, 언젠가는 돌아가리라는 것, 언젠가는 고향으로 돌아가 부모
형제를 다시 만날 것이라는 희망이 우리 인간들을 살아 있게 해 주었다.
1945년 7월의 어느 날 아침.
전에 없이 일본인 감독들이 서둘러 짐을 꾸리고 있었다..
왜놈들이 태평양 전쟁을 일으켜 미국과 싸우고 있다는 이야기가 간간이 들려
왔고, 또 왜놈들이 요즈음에는 맥을 못 춘다는 전쟁 소식을 들었지만, 소련군이
이 사할린 섬에 상륙한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하루 아침에, 일본인 감독들이 떠난 탄광은 믿기 어렵게, 폐광처럼 변했다.
정적이 감도는 사할린의 한 탄광.
우리들 모두는 모여 웅성웅성거렸고, 또 말없이 쪼그리고 앉아 담배만 물고 있
었다. 더 이상 땅굴 속으로 들어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들이 오히려 우리들을 이
상하게 불안스럽게까지 느껴지게 하고 있었다.
나와 한 쪽 다리가 달려나간 이병렬도 양지 바른 언덕에 앉아 있었다.
"아무래도 일본이 항복한 모양이야…."
이병렬은 이제 노인처럼 늙어 있었다.
"우리는, 우리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나는 짧게 물었다.
"글쎄, 그럴 수 있겠지…."
이병렬은 자신 있게 말을 못했다.
하루종일 그렇게 나와 앉아 있던 조선인 징용자들도 해가 산꼭대기에 걸려 붉
게 물들자 하나, 둘 자리를 뜨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들은 우리들 스스로 최초의 자유로운 저녁 밥을 준비하기 시작했
다.
아무도 무슨 말을 정확히 하지 않아도 그건 분명 우리들의 만찬이었다.
나와 이병렬은 산들거리는 7월의 바람을 맞으며 넘어가는 저녁 해와 바람과 노
을에 물든 저편 언덕의 나무와 풀과 꽃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저씨는 가족들이 없나요?"
나는 최초로 이병렬에게 물어 보았다.
이병렬은 고향이 경상남도라는 이야기 외에 식구 이야기는 여태껏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있지…, 살아들 있을 거야…."
못 먹어 죽은 아내, 정신대로 끌려가 남양 군도에 있을 딸, 그리고 왜놈들을 피
해 상해 임시정부로 독립운동하러 간 아들….
그야말로 이병렬은 자기의 뜻과는 관계 없이 홀홀 단신이 되어 버렸다. 죽고
뿔뿔이 흩어진 가족.
어둠이 내리고 나와 이병렬은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 내며 일어섰다.
누군가 장작불을 피워 놓은 곳에 우리들 최초의 만찬이 벌어지고 있었다.
누가 무엇을 어떻게 하라고 시키지 않아도 우리들은 창고와 식당에서 먹을 것
들을 찾아 내어 준비했다.
따뜻한 보리밥, 소금에 절인 무우, 일본식 된장국.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저녁이
었다.
초여름의 밤하늘에 달이 휘영청 떠 있었다.
어디선가 아리랑 노랫가락이 흘러나오자 모두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고 있었다.
해방감.
나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줄줄 흘러 내리고 있었다. 지난 7년간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갔다.
내 나이 스물 여섯이었다.
이제는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알 수 없는 일말의 불안감이 우리들 모두를
뒤덮고 있는 것 같았다.
이병렬도 장작불 주위를 돌며 덩실덩실 춤을 추고 있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50년이 다 되도록, 조국의 땅을 밟지 못하고 이 곳 사할린에
서 죽거나, 겨우 일부만이 돌아갈 수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하고 있었다.
2.
1940년 가을. 중국 상해 임시정부에는 젊은이들이 속속 모여들고 있었다.
거기에는 이병렬의 아들 이결도 있었고, 우리의 주인공 김승운의 막내 동생 김
승혁도 열 여덟이라는 어린 나이에도 푸르고 빛나는 눈빛을 하고 끼여 있었다.
임시정부 주석은 김구 선생이었다.
굵고 둥근 안경을 낀 김구는 젊은 그들의 손을 잡았다.
이결, 김승혁의 눈에는 조국 독립을 위한 신념과 의지가 불타고 있었다. 그러나
너무나 비방한, 젊은 목숨까지 각오한 그들을 바라보며 김구 선생은 마음 속으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조국 독립을 위한 임무가 그들에게 주어질 때
까지 이결과 김승혁이 머물 거처를 이야기해 주었고, 식구들 이야기를 물어 보았
다.
낡은 목조 건물 2층 안으로 한 줄기 햇살이 들어와 김구 선생과 이결과 김승혁
이 마주앉은 데를 비추다, 다시 뒤편 벽에 걸린 커다란 태극기 쪽에 멈춰 있었다.
"저희 아버지는 지금 일본 땅에 계십니다…."
이결은 벌써 첫 마디에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지난 5년간 한 번도 불러 보
지도 못한 아버지라는 말 때문이었다. 그리고 남양 군도 어딘가에 가 있다는 옥
희. 못 먹어 죽은 어머니가 순식간에 떠올라 가슴이 메이어 왔지만 조국 독립 운
동 본부인 이 곳 임시정부에서 눈물을 보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결은 키가 크고, 얼굴이 좀 말랐지만 어딘가 모르게 선비의 인상 같은 것이
풍겼고, 두 눈은 크고 둥글고 부리부리했으며, 입술은 굳게 다물어져 있었다. 그
의 한 마디 한마디는 그야말로 몸 깊은 곳에서 혼신의 힘으로 쏟아져 나오는 것
처럼 느껴질 정도여서 김구 선생은 좀 긴장된 얼굴로 이결을 바라보고 있었고,
김승혁 또한 온몸이 굳어지면서도 그보다 대여섯 살 많은 듯한 이결의 모습을 놓
치지 않고 주시하고 있었다. 찻잔엔 아까부터 뜨거운 차가 부어져 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손을 대지 않았다.
이결은 찬찬히 여동생과 어머니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그리고는 그것뿐, 다시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이번에는 김승혁 차례였다.
"자네 몇인가?"
"열 여덟입니다."
김승혁도 이결과 같이 부모 이야기를 했다. 너무나 조용한 분위기여서 숨소리
조차 크게 쉴 수 없었다. 김승혁은 형 김승운이 일본 어디론가 끌려간 후 농사
일을 혼자서 도맡다시피한 아버지가 병이 나 있다는 것과, 그런 집안 형편 속에
서 집을 나오기까지 자신의 고뇌에 대해 엄숙하지만 간단하게 말했다.
"못 살고 굶주리며 무너지는 집을 두로 하고 홀로 떠나온다는 것은 어쩐지…,
잘 한 일 같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대장부가 한 번 집을 나오면 살아 돌아가
지 않는다는 윤봉길 선생님의 마음을 알고부터는 괴로워하고 있는 이 땅에서
저 왜구의 무리들을 몰아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이제 정적은 터질 것만 같았다.
그 정적을 김구는 조용히 창문을 열면서 다시 활기를 불어 넣고 있었다. 그리
고 김구는 서로의 시계를 맞바꾸었던 윤봉길 의사를 생각하며 주머니 속에 든 윤
의사의 시계를 살며시 쥐었다. 따뜻했다. 그의 온기가 채 가시기도 전에, 윤 의사
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의 나이 25세. 지금 이결과 똑같은 나이였다. 김구
는 고개를 돌려 이결을 잠시 바라보았다. 키가 크고 두 눈이 부리부리하고, 넓은
이마가 윤봉길과 아주 닮아 있었다. 김구는 잠시 고개를 숙이고 다시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어느 새 눈에 고이는 눈물이 시야를 흐리게 가리고 있었다. 이결과
김승혁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김구는 안경을 벗어 닦는 것처럼 하면서 슬쩍 눈물
을 찍어냈다.
이결에게 주어진 임무는 조선 총독부를 폭파하는 것이었다.
김승혁에게는 일본군 평양 사단에 위장 입대하여 비밀을 캐내는 것이었다. 이
일본군 평양 사단은 아예 그 연대의 하나를 압록강 쪽에 주둔시켜 놓고 우리 독
립군을 괴멸시키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 군대였다.
앞으로 꼭 한 달 뒤, 그들은 다시 그들의 땅, 조국 조선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
때까지 폭탄을 다루는 법이며, 총 쏘는 법과, 약식 훈련을 받도록 되어 있었다.
상해 도시의 뒷골목에도 가을비가 뿌리던 날, 이결과 김승혁은 임시 정부로 향
하면서 벌써 두 번째 뒤를 슬쩍 돌아보았다. 희뿌연 안개마저 낀 상해 뒷골목에
우중충하게 늘어선 2층 판잣집 처마 밑은 어둡게까지 느껴졌지만 분명 중절모를
푹 눌러 쓴 녀석이 아까부터 그들의 뒤를 따라오고 있었던 것이다.
이대로 계속 가다간 임시정부와 김구 선생마저 위험할 것이라는 생각을 이결과
김승혁은 하고 있었다.
"녀석을 따돌리자."
이결이 나직하게 김승혁에게 말했다.
"예."
김승혁은 이마에서 타고 내리는 차가운 빗물을 혓바닥으로 찍어 맛보며 말했
다.
"내가 저 식당 뒤를 돌아갈 테니까,김 형은 곧장 자연스레 걸어 가시오."
빗발은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
녀석은 이결을 포기하고 김승혁의 뒤를 멀찍이 따라오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
도 중절모를 쓴 녀석의 키가 꽤 큰 편임을 알 수 있었다.
이결이 뒤로 돌아간 식당을 지나자 좁은 골목이 사라지고 공터가 나타났다.
이제 중절모를 쓴 녀석은 어미에도 몸을 감출 수가 없어 당황하고 있었다.
바로 그 때, 식당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결이 비호처럼 날아들어 녀석의 목
덜미를 낚아챘다.
"악! 타스케떼!"
그 때 김승혁이 녀석의 중절모를 확 잡아 벗기며 진흙탕에 내동댕이쳤다.
순간 김승혁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어디서 많이 본 녀석이었던 것이다. 그것
은 녀석도 마찬가지여선지 몹시 놀란 눈을 하고 있었지만, 이내 눈을 내리깔았다.
"쪽발이 새끼!"
이결이 한 방 더 먹일 기세였다.
"잠깐. 쪽발이가 아니오. 그 녀석은!"
김승혁은 녀석의 고개를 손으로 들어 올렸다.
"나 아시겠소!"
녀석은 이제 틀렸다는 듯, 고개를 아래위로 끄덕였다.
큰 키에 옆으로 째진 눈. 배싹 마른 얼굴. 이원택. 김승혁의 형 김승운을 끌고
가고, 김승혁이 자취를 감추자 그의 아버지를 지서에 끌고가 사람이 다 죽도록
문초한 바로 그 이원택이었던 것이다.
왜놈 순사 타나까 뒤를 졸졸 따라다니던 이원택은 타나까가 상해로 파견되어
오면서 쓸모가 있는 쵸센징이라는 이유로 타나까와 함께 이 곳까지 온 것이었다.
그리고 녀석의 임무는 주로 임시정부를 중점으로 하는 독립운동자들을 알아 내는
것이었다.
"어떻게 할까?"
"음…."
김승혁은 막상 어떻게 이 이원택을 처리해야 될지 곤란했다. 죽일 수도 그냥
놔 둘 수도 없는 처지였다….
"놔 줍시다."
김승혁은 그렇게 말했다. 만약 이 때 그가 이원택이 그의 아버지에게 한 짓을
알았더라면 녀석을 어떻게 했을는지도 몰랐지만, 원한이 없는 자를, 동포를, 같은
고향인 그를 그렇게 쉽게 죽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결이 이원택의 목덜미를 놓자마자 이원택은 진흙탕에 빠진 중절모를 집어들
고 잽싸게 달아났다.
"녀석과 언제든 또 만날 거야…."
이결이 눅눅히 적은 담배에 오랫동안 불을 부치면서 말했다.
"그렇게 되지 말아야죠…. 녀석은 교활한 놈이라 우리와 임정을 계속 조사할
겁니다. 저 놈의 상관인 타나까도 어지간한 놈이 아니거든요."
그리고 김승혁은 형 김승운과 누나인 혜민에 대해서 이결에게 이야기했다. 형
이 끌려가고 얼마 되지 않아서 김승혁도 이 곳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이결은 쏟아지는 비를 그대로 맞으며 빗속으로 담배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우리 아버지도 일본으로 갔는데, 어디에서 무얼 하시는지, 통 알 수가 없어…."
고국을 떠나 여기 이렇게 비 내리는 상해 이국 땅에 이결과 김승혁이 마주 서
있듯이, 이결의 아버지 이병렬과 김승혁의 형 김승운이 또 다른 이국의 땅, 적국
일본의 사할린 탄광에 있는 줄은 서로가 아무도 몰랐다….
빗발이 보이지 않자 어둠이 밀려 왔다.
3.
1944년 인도네시아 남방의 섬. 남양 군도
여기에 우리 조선에서 끌려온 여자들이 수십 명 토굴에서, 혹은 다 찢어진 천
막 속에서 벌써 6년째 악몽 같은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그 속에 생기라고는 전혀 없는 누런 얼굴로 헝클어진 머리에 몸이 몹시 야윈
이옥희와 순이도 끼여 있었다. 둘 다 얼굴에는 핏기가 없었고, 이제 스무 살이 된
순이는 키마저 왜소해 언뜻 보기에 그녀가 여기 처음 끌려왔을 때의 열 네 살 어
린 소녀처럼 보였지만, 얼굴은 지난 6년을 60년처럼 산 고통의 흔적이 역력했다.
이옥희 사할린 탄광에 있는 이병렬의 딸이요, 중국 상해에 있는 이결의 동생이
었다. 또한 순이는, 김승운의 옆집에 살던 이원택에 의해 정신대로 끄려갔던 김순
이였다.
처음에는 백 명도 넘던 조선인 여자들이 만주에서 필리핀으로, 다시 이 곳 남
양 군도로 이동하는 일본군에 끌려 다니다 이제 오십 명도 채 되지 못했다. 병들
어 죽고, 왜놈들의 칼에 찌려 죽고, 쏟아지는 포탄에 맞아 죽고, 시름시름 고향
병을 앓다 죽고, 미쳐 죽고, 더러워 진 몸을 견디지 못해 목 매달아 죽어갔던 것
이다.
1938년에서 1944년까지의 긴 역사의 악몽을 간직한 그녀들이었다. 간혹 그 중
에는 중국인 여자도, 필리핀 여자도, 돈을 벌기 위해 온 일본인 여자도 섞여 있었
다.
무더위와 벌레와 학질이 남양의 정글 속을 뱀처럼 휘돌고 있었다. 그 속에 일
본군과 미군과 끌려온 조선인들이 끝도 없는 전쟁을 벌이고 있었고, 순이와 옥희
는 일본군에게 강제로 끌려온 정신대였다.
대동아 공영권을 부르짖으며 일본은 아시아를 하나 둘 자기 것으로 집어 삼키
며, 되지도 못한 아시아의 주인임을 자처하고, 서양에 대결하기 위해 일본을 중심
으로 뭉치자는 제국주의의 논리를 펴왔다. 그 속에서 희생양은 불쌍한 인간들이
었으며, 사람으로 태어나 사람으로 대접 받지 못한 조선인들이었다.
이형식. 바로 이원택이 자기 삼촌을 징용했던 그 사람. 이형식. 그도 이미 나이
서른 다섯에 일본 군모를 쓰고 소총을 들고 여기 남양 군도에서 아무 원한도 없
는 연합군과 싸우고 있었다. 만주에서 다른 학도병과 같이 탈출하지 못했던 것이
벌써 6년째 일본 군모를 쓰게 된 것이었다. 탈출하다 잡히면 즉시 사형이었기 때
문에, 이형식은 그것이 무서웠다. 일본군 하사관들에게 인간 이하의 멸시를 받는
쵸센징 일본군인으로서 그는 이제 전쟁이 끝나고 고향으로 살아 돌아갈 날 만을
마음 속에 유일한 희망으로 간직하고 있었다.
같은 고향, 같은 마을에 살 던 순이도 있었고, 같은 쵸센징 옥희도 이 남양 군
도에 있었다.
이형식은 정신대 여자들이 거의 조선인인 것을 알았지만, 그 날은 자기도 모르
게 일본군과 똑같이 여자와의 접촉을 위한 대열에 끼어 있었다.
적도의 태양이 정수리 위에서 지글지글 끓는 오후였다.
다 찢어진 천막을 밀어제끼며 짐승처럼 들어가는 왜놈들을 바라 보면서 이형식
은 몇 번이나 늘어선 줄에서 도망치려고 했지만, 그것마저도 욕정에 몸이 타올라
낄낄거리는 왜놈들 가운데서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았다.
대열은 조금씩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가 사라지며 줄어들고 있었다.
앞뒤 일본군의 몸에서는 땀과 흙 냄새로 악취가 풍기고 있었다. 이형식은 스스
로 자신의 군복에 코를 갔다대어 보았다. 역시 지독한 동물의 냄새가 났다. 그는
눈을 감아 버렸다. 뒤에서 누군가가,
"쿠마모토(이형식의 일본 이름). 쿄우 요쿠 얕테 미레(오늘 잘 해봐)!"
하고 놀리는 소리가 났다. 같은 조선인끼리 잘 해보라는 말….
이형식은 눈을 뜨지 않았다. 바로 머리 위에서 끓고 있는 태양 때문인지 의식
이 가물거리는 것 같았다. 그 속에서 고향집이 생각났다.
형식은 갑자기 차갑게, 짜게 입으로 흘러드는 감촉을 느끼며 눈을 떴다. 눈물이
었다. 그리고 어느 새 천막이 코 앞에 있었다. 자신은 이제 뒤로 돌아설 용기가
없음을, 그리고 욕정에 이끌리어 오늘 이 줄에 선 위선자임을 동시에 느끼며 천
막을 밀고 안으로 들어섰다. 확하고 역겨운 냄새가 나면서, 저 쪽에 뭔가가 희미
하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1945년으로 접어들면서 일본군의 전세는 기울고 있었다. 식량과 보급품마저 제
대로 들어오지 않았고, 무더위와 남태평양 정글의 질병이 일본군을 쇠약케 하고
있었다.
여기에는 이형식 말고도 학사모 대신에 일본 군모를 쓴 조선인들이 열댓 명이
나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강제로 징병을 당한 식민지국의 억울한 청년이었지만,
그들은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전장에 와 있는지 모를 비극의 인간들이었다.
과연 그들의 적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일본군인가, 미군인가?
이형식은 그렇게 옥희를 만나게 된 것이다.
욕정. 그게 전혀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옥희도 이형식이 조선인임을 알고는 오
히려 몸을 주려고 했다. 그러나 옥희와의 관계가 성공한 것은 그로부터 몇 달 후
였다.
미군과의 교전이 잦기 시작했다. 그들은 막강한 화력과 물자를 갖고 있어 우리
들은 그들의 시체더미를 무슨 보물처럼 이리저리 뒤지고 다녔다.
야자 열매와 나무 껍질, 뱀이 우리의 주식이 된 지 오래였다. 탄약과 총알마저
미군들이 장악한 남태평양을 건너오지 못해 우리들은 이제 적들의 탄약을 빼앗아
쓰고 있었다.
이형식은 탈영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렇게 죽어나 저렇게 죽어나 마찬가지였다.
기회만 오면 탈출하리라 마음먹고 있었지만 정글 숲을 손바닥 보듯 훤한 일본군
하사관들에게 잡히면 잔인한 죽음을 각오해야 했기에 두려움이 떠나지 않았다.
옥희는 같이 탈출하자고 했다. 거기에다 순이까지도. 이형식은 거절할 수도 승
낙할 수도 없는 자신을 느꼈다.
일본군의 전세는 급격히 기울고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사수냐, 후퇴냐, 그것
뿐이었다. 최후가 오면 일본군들은 그들의 천황을 위해서 자결할지도 몰랐다.
1945년 5월.
비마저 내리는 칠흑 같이 어두운 정글의 밤.
이형식과 이옥희와 순이는 정글 속을 헤집으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이형식의 손에는 소총이 들려져 있었고 옥희와 순이는 홑몸이었다. 마치 모든
더러운 찌꺼기를 내버려 두고 싶은 것처럼….
열대 정글 속의 밤.
세 남녀가, 세 조선인이, 남양 군도에서 짐승처럼 쫓기며 찢기며 나아가고 있었
다.
혹 이 곳 원주민과 만난다면 도움을 청하리라고 이형식은 생각했다. 순이는 몸
이 성치 않았다. 야위고 말라 비틀어져 생기가 없고 헉헉거리는 기침을 쏟아내며
자꾸 뒤쳐지고 있었다.
이형식 일행의 탈출은 이미 발각되었을 것이다. 정글을 손바닥 보듯 샅샅이 아
는 일본군 하사관 야마무라가 이형식의 머리 속에 벌써 그려지고 있었다.
순이는 이제 더 이상 갈 기력도 없었다. 그 자리에 주저앉으면 이형식이 위험
하리란 것도 알았지만, 벌써 아까부터 기침을 할 때마다 쏟아지는 각혈을 몰래
감추어 오지 않았던가….
그런 순이를 보면서, 이형식은 잠시 쉬어 가기로 했다.
허기진 배를 채울 것이라곤 건빵 한 봉지와 물뿐이었다.
마지막 만찬….
적막과 두려움 속에서 그들 셋은 최초로 평화감을 맛볼 수 있었다. 마지막 그
들끼리의 이야기…, 그들만의 자리, 고요가 그렇게 열대림 속에서 베풀어지고 있
었다. 어딘가 머리서 들리는 짐승의 울부짖는 소리…, 놀란 새들의 날갯짓 소리
….
원주민들도 보이지 않고, 바닷가로 나간다고 해도 배가 있을는지 모르고, 일본
군 야마무라의 추적을 계속 받으면서도, 이형식은 이제 어디로 가야할지 막막해
졌다.
이제 어떻게 하나….
바지직 바지직.
뭔가 다가오는 소리에 이형식은 눈을 떴다.
정글에 사는 동물일까?
아니면…, 야마무라일까?
이형식은 옥희와 순이를 서둘러 깨웠다.
그 순간, 잠도 들깬 옥희와 순이를 흔드는 순간,
"하하하!"
하고 이형식의 등뒤에서 야마무라가 긴 칼을 들고 웃고 있었다.
여기서 죽으나 끌려 가서 죽으나 매 한가지…, 이형식은 날렵하게 소총이 있는
곳으로 몸을 날렷다. 그 찰라,
"야앗!"
하면서 야마무라가 날라들었다.
그러나 이형식이 총을 잡고 옆으로 뒹구는 게 더 빨랐다. 그렇지만 노리쇠를
뒤로 후진시킬 여유는 없었다.
칼과 총을 든 일본군 하사관 야마무라와 조선인 일본군 상등병 이형식이 서러
마주 노려보고 있었다.
이럴 때는 총보다도 칼이 더 유리하게 보였다. 야마무라는 동물적 웃음을 흘리
며 칼을 높이 쳐들었다.
바로 그 순간, 옥희가 느닷없이 굵은 나무로 야마무라의 머리통을 내리쳤고, 이
형식은 총 개머리판으로 쓰러진 야마무라를 내리쳤다. 그리고 총을 장전하고는
방아쇠를 당겼다. 탕! 순식간의 일이었다. 앞뒤를 재고 할 것도 없었다. 이형식은
겁에 질려 있었고, 본능적으로 적을 죽인 것이었다. 살아 있어 무서운 적. 야수와
같은 적. 일본군 하사관 야마무라. 그에게 당한 조선인들의 고통에 비하면 야마무
라의 최후는 오히려 너무나 간단한 것이었다.
1950년 사할린….
김승운(나)과 이병렬은 결국 조국 조선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남게 된 징용자들
이었다. 아니 돌아간 사람은, 돌아갈 수 있었던 삶은 겨우, 한, 둘. 그것도 일본인
아내를 둔 사람만 가능했다.
그들은 우선 일본인 철수 정책에 따라 일본으로 돌아갈 수 있었지만, 일본이 전
쟁에 지고 소련군이 사할린에 들어오면서 이 땅은 소련 영토가 되어 버렸고, 조
선인 징용자들은 일본으로도 조선으로도 떠나갈 수 없었다. 사할린에 노동력이
필요하다는 소련군과 일본의 잔악한 술수였다.
이제 먹고 살기 위한 막장 작업이 계속되었다.
조국이 일본에게서 해방되었다는 소식은 벌써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너무나 먼 돌아갈 수 없는 땅이었다.
일본군이 물러간 1945년부터는 김승운이나 이병렬은 고향 소식은 한 번도 듣지
못했다.
그래서 나(김승운)는 아버지가 이미 돌아가신 것도 몰랐고, 동생 김승혁이 반
으로 갈린 조국의 북쪽 땅에 있는 것도 몰랐으며, 혜민이가 결국 일본 놈의 앞잡
이였던 이원택의 아내가 된 줄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그것은 이병렬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나이 60을 바라보면서도, 남양 군도로
끄려간 옥희가 거기를 탈출하여 태국에 있는 것도 몰랐고, 아들 이결이 임시정부
김구 선생 일행과 같이 귀국하여 육군 장교가 되어 있는 것도 몰랐으며, 또한 자
신의 몸 속에서 폐병 균이 퍼져 나가는 것도 모르는 채, 쿨룩거리는 거친 기침만
쏟아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해 여름 우리는 조국에 난리가 터졌음을 알게 되었다. 반으로 갈린
북쪽에서 남쪽을 친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사실도 우리에게는 아직 미미한 것이었으며, 우리들 가슴 속에는
식구들과 고향 생각뿐이었다. 그 난리가 얼마나 큰 전쟁이었는지도 몰랐지만, 우
리는 식구들이 무사하기만을 애태우며 빌 뿐이었다.
내 나이 서른 하나.
이병렬은 나에게 장가갈 것을 자주 권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병렬은 눈이 파란 갓 스물이 된 소련인 처자를 하나 데리고
왔다.
얼른 보기에도 남루한 옷차림, 꾀죄죄한 얼굴, 무엇하다 온 여자인 줄도 모른
는 채, 나는 조선인 징용자들 몇몇 앞에서 그녀와 혼인을 했다. 이름은 네시카였
다.
조선인 징용자 숙소 앞에 이병렬과 동료들이 지어준 작은 집에 나는 네시카와
보금자리를 꾸몄다.
네시카는 거칠면서도 집안 일은 잘 해나갔고, 나와의 사랑은 거저 생계를 유지
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았지만, 가을이 오고, 또다시 북국의 긴 겨울이 오면서 네
시카는 나의 아이를 뱃속에 키우고 있었다.
1950년 여름, 스물 여덟 살의 김승혁은 인민군 소위 계급을 달고 낙동강 전선
에서 같은 동족의 국방군과 또 유엔군과 대치 중이었다.
낙동강 벌은 여름이면 친구들과 헤엄을 치고 고기를 잡던 김승혁의 고향이었지
만, 치열한 전쟁 중에 그는 아직 그의 부모와 누나 혜민이가 있는 고향집을 찾아
보지 못했다. 그리고 그도 역시 벌써 수년 전에 그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줄은 꿈
에도 모르고 있었고, 중국 상해에서 마주친 이원택이 혜민의 남편이 되어 있는
줄도 몰랐으며, 중국 땅에서 생명을 걸고 조국 독립을 위해 함께 싸웠던 이병렬
의 아들 이결이, 국방군 대위가 되어 바로 낙동강 다리 건너에 있는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지난 두 달 가까이 물밀 듯 밀고 내려온 전선이 낙동강에서 벌써 보름째 꼼짝
도 하지 않고 있었다.
일말의 불안감이 김승혁을 사로잡고 있었다. 그의 푸르고 빛나던 눈동자에도
우수와 독기가 서려 있었다. 그것은 이미 임시정부의 지시로 일본군 평양 사단에
위장 입대하면서부터, 그리고 쵸센징이라는 이유로 일본군 놈들에게 잔혹한 취급
을 받을 때부터 자라난 독기였다. 그리고 수시로 평양 사단의 기밀을 조선인 첩
자에게 전달하면서, 견디기 힘든 불안과 공포를 느끼면서 일본군 상등병이 되었
고 병장이 되었다. 그러다 임시정부의 특공대가 평양에 낙하산으로 투하될 것이
라는 정보를 받은 날, 김승혁은 일본군 부대를 탈영했고, 이미 북쪽에서 진주하기
시작한 소련군에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다가 인민군에 넘겨진 것이었다.
김승혁으로서는 선택의 여지도 없이 인민군이 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조
만식 선생을 체포할 때부터, 김일성이 진정한 조국의 해방과는 거리가 먼 정권
야욕에만 불타는 것을 알 수 있었고, 또 김일성에 반대하는 독립운동가들을 하나
하나 제거해 가는 것을 보면서, 김승혁은 이미 자신이 발을 뺄 수 없다는 것을
직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가 존경하던 김구 선생이 조국의 진정한 독립과 통일을 위해 남쪽 협
상 대표단을 이끌고 북에 들어왔을 때도 거저 먼 발치에서 뜨거워지는 눈시울만
붉힐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해서라도, 아니 김일성과 나란히 선 강단 위로 뛰어
올라가 부둥켜 안고 싶었지만, 그것은 이미 지신의 목숨을 담보하지 않으면 안되
는 잔인한 숙청의 길을 의미하고 있었다. 남반부 출신에 임시정부에 있었다는 것
만으로도 김승혁은 알 수 없는 감시의 눈초리를 의식해야 했기 때문에, 열성적으
로 인민군 소위의 계급을 지켜나갈 수밖에 없었다.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불바다가 되는 낙동강의 산야를 바라보면서 김승혁은
고향쪽 마을만은 제발 무사하기를 간절히 빌고 있었다.
이 강만 건너면 바로 고향 마을이었다. 그러나 진격은커녕 유엔군의 폭격은 날
로 거세지고 있었다.
거지나 다름없는 부하들을 바라보면서, 이제 열 다섯이 되었을까한 소년병들을
바라보면서 김승혁은 그들의 눈에서 죽음의 그림자를 느낄 수 있었다.
벌써 한 달째 참호 속에서 굶주린 개처럼 웅크리고 앉아 식량과 탄환과 보급품
이 오길 기다리고만 있었다.
옷과 몸에서는 썩는 냄새가 진동을 했지만, 김승혁은 고향집을 생각하며 모든 것
을 참고 있었다.
낙동강의 밤에도 쌀쌀한 가을 기운이 감돌던 어느 날 밤, 다리 건너 적들의 대
규모 도하 작전이 시작되면서, 김승혁은 죽지 못해 살아 있는 부대원들에게 또다
시 사격 명령을 내리고 있을 때, 인민군 사단에서 퇴각 명령의 무전이 날라 들었
다.
김승혁은 뭔가 낌새가 이상하게 돌아감을 느낄 수 있었다.
먹지 못해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소년병을 부축하며 김승혁은 소대원들을 데리
고 야간 후퇴를 개시했다.
대한미국 육군 대위 이결.
낙동강 도하 작전의 선봉부대가 바로 이결 대위가 이끄는 중대였다.
그의 나이 이미 서른 다섯이었지만 예나 지금이나 마르고 큰 키는 변함없었으
나 이마와 양 눈가에 제법 굵은 주름이 둘, 셋씩 각인된 것이, 그 도안 세월의 시
련을 말해 주고 있었다.
아군과 적군의 빗발 같은 포탄 속에서 감행하는 야간 도하 작전이라, 이결 자
신이나 중대원들 모두 마음 속으로 비장한 각오를 하며, 초가을 밤의 낙동강 물
살을 가르고 있었다.
적잔 참호의 기관총이 불을 뿜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적의 화력은 분명 아군
보다 열세하다는 것을 느끼며 이결은 쏟아지는 포탄과 파편과 작렬하는 굉음 속
에서 중대원들에게 머리를 더 숙이라고 지시하면서 상륙 지점을 살피고 있었다.
이결은 이미 사할린이 소련 공산당의 손에 넘어간 것을 알고 있었지만, 아버지
이병렬의 행방에 대해선 알 수 없었다. 소식이 끊긴 지 벌써 5년째였다. 또 그건
여동생 이옥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옥희가 남양 군도를 탈출해 태국에 있다
는 사실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조국 독립을 위해 생사를 같이 했던 김승혁이 지금 인민군
소위의 계급을 달고, 바로 낙동강 산야의 적 진지에서 후퇴를 서두르며 그와 총
부리를 겨누고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1940년 겨울, 김승혁과 이결은 임시정부에서 훈련을 마치고 각각 평양과 서울
로 들어 왔다. 김승혁은 일본군 평양 사단으로, 이결은 조선 총독부를 폭파하기
위해 함께 들어왔으나 평양에서 헤어졌다. 그리고 조국이 해방되는 날까지 살아
있어 주기를 빌며 둘이는 굳게 잡은 손을 오랫동안 놓지 않았다.
조선의 왕들이 대대로 살아온 경복궁궐 바로 앞에 저들의 식민지 통치의 원흉
인 총독부가, 꽁꽁 얼어붙어 가는 겨울 끝에 을씨년스럽게 서 있었다.
총독부 놈들이 제일 많이 붐빌 아침, 출근 시간이 제일 좋을 것 같았지만, 자연
스럽게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게 문제였고, 총감과 일인 관리들이 모일 회의실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아두어야 했다.
그런데 마침, 추운 겨울 날 낮과 밤을 잊으며 총독부 앞을 감시하고 있을 때,
눈에 익은 조선인 하나를 발견했고, 그가 바로 소학교 친구임을, 그리고 지금은
먹고 살아가기 위하여 할 수 없이 왜놈들 밑에서, 바로 그 총독부 안에서 일을
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그 친구를 따라 자연스럽게 총독부 안을 살펴
볼 수 있은 끝에, 그 친구마저도 모르게 이결은 거사일은 이 왜놈들이 한 곳에
다 모이는 섣달 그믐날밤, 망년회가 열리는 날로 정했다.
도시락을 위장해 만든 폭탄은 이미 임시정부를 출발할 때 갖고 온 것이었다.
바로 윤봉길 의사가 중국 상해 홍구 공원에서 왜놈 대장들에게 던진 폭탄과 거의
똑같은 것이었다. 다만 다른 것이 있었다면, 윤봉길 의사는 자살용 폭탄을 수통처
럼 만들어 갖고 있었다는 것과, 이결은 폭탄을 던지고 거길 도망쳐 나와야 된다
는 것이었다.
그래서 결국, 폭탄은 던졌으며 그것은 1940년 겨울의 마지막날 밤을 조국 해방
을 위한 불꽃으로 작렬했고, 다음 날 신문에 수십 명이 죽고 부상을 당했다는, 그
들의 말로 <괴한에 의한 폭거>는 성공했다.
그 길로 3년간을 숨어 지내다가 이결은 1944년 다시 중국으로 잠입했고, 1945
년 임시정부 주석 김구 선생과 같이 해방이 된 조국의 품으로 무사히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지난 5년간의 흔적이, 도피와 도망의 나날들 속에 굶주림보다 견디기 힘든
불안과 공포가 지금 이결 대위의 얼굴에 짙고 굵게 각인된 주름살을 남겨 놓은
것이었다.
상류 지점을 눈 앞에 두고 아군의 도하선들이 적들의 거센 저항을 받고 있었
다.
강을 건널 때까지 무사했던 이결의 중대도, 상륙을 시도하면서 부하들이 하나,
둘 적의 기관총과 포탄에 쓰러지고 있었다.
"힘을 내라, 앞으로 진격! 진격!"
쓰러지는 부하들을 뒤돌아보지도 못하고 이결 대위는 적의 진지가 있는 산등성
쪽으로 오르고 있었다.
날이 새고 있었다.
퇴로는 이미 막혀 있다, 인민군 소위 김승혁은 그렇게 생각했다.
간밤에 불바다가 되었던 낙동강의 산야가 아직 새파란 포연을 뒤집어 쓰고 있
었다.
이제는 뒤로 물러설 수도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었다.
김승혁 소대가 퇴각하는 앞쪽에서 벌써 포성이 울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승혁은 낙동강을 지키던 인민군 사단 전체가 거의 괴멸된 것 같이 느껴졌다.
퇴로마저 차단되었다.
신음하는 병사들….
그들은 팔과 다리가 떨어져나간 도살되고 있는 짐승에 불과했다.
한쪽 귀가 떨어져 나간 소년병. 자신의 옷을 찢어 머리를 싸매었지만, 거기서도
피가 뜩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한쪽 팔이 없는 병사는 그래도 고통을 참아내려고 길길이 뒹굴었지만, 두 다리
에 중상을 입은 병사는 이제 온 몸에 전율을 일으키며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파
편이 그의 배 밑으로 온통 박힌 것이었다.
"군관 동무! 아악…, 어서 날 쏴 달라요! 아악…."
그는 아까부터 그렇게 신음하며 애원하다가 깜박깜박 의식을 잃곤 했다. 차마
눈 뜨고는 볼 수 없는 인간의 최후들이었다.
김승혁이 자신의 허리에 찬 권총을 잡았다간 놓고, 또 잡았다간 놓고 하기를
몇 번….
탕!
군관 동무를 찾던 병사는 죽어서 차라리 웃고 있었다.
결국 남태평양 정글 속에서 피를 토하다 지쳐 죽어간 순이. 그리고 원주민의
도움으로 배를 얻어 타고 태국의 남쪽으로 흘러든 이형식과 옥희.
또다시 이국의 땅….
그러나 이국의 땅에서, 이국인으로 그들의 운명이 30년을 보낸 후에도 조국으
로 돌아오지 못하고 거기서 끝나리라는 것은 그들 자신조차도 꿈결에도 생각치
못한 것이었다.
낯선 이국의 시장에서 온갖 행상을 해가며 고향으로 돌아갈 날만을 기다리면서
도 이제 전쟁이 끝났다는 것, 그리고 다시 한국에 전쟁이 터졌다는 것을 들을 수
있었지만, 남쪽과 북쪽이 갈라져 왜 싸우는지는 도무지 알 수도 없는 일이었다.
옥희는 이미 아이를 나을 수 없는 몸이었다.
이형식과 옥희는 살을 섞으면서도 각각 잔인한 악몽에 시달리고 있었다. 일본
군 진지 주위에 처져 있던 낡은 천막 속의, 그 날의 옥희 모습을 이형식은 살을
섞을 때마다 잊을 수 없었고, 옥희 또한 수백 명의 일본군의 얼굴이 떠올라 악몽
에 치를 떨었다.
전쟁의 상처는 그들 몸 속에 깊이 깊이 새겨져 있었다.
만족한 부부의 관계가 이루어지지 못하면서 때론 낯선 이국의 여자를 이형식은
안았지만, 결국 옥희에게 돌아오지 않을 수 없는 자신임을 알았다.
태국군이 한국에 참전하기 위해 떠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이형식 자신
이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설레이었다.
그리고 빌었다.
제발 조국의 전쟁이 참상이 아니기를.
그리고 자신과 옥희가 하루라도 빨리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한국 전쟁이 끝났다는 것을 .......(1999/9 문예지 연재)... to be continued her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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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page was made by Korean novelist Youngkwan Kim.2000/7